자유글

단심가와 정몽주

아설타 2007. 8. 20. 16:25

                    단심가(丹心歌)와 충신 정몽주 
                                                                     / 행복한 나비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하여가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대로 얽혀져 백년만대 하리라 ”

  단심가는 고려 말기의 충신인 정몽주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 방원(태종)의 새로운 나라(조선)의 건국에 함께 할 것을 강요하는 회유(하여가)에 답하여 지은 시조로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나타낸 시조로서 특히 종장에서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며 이미 기울어 가고 있던 고려이지만 끝까지 굳은 결의를 지키려는 유학자의 자세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작자의 일관된 신념이 잘 나타난 부분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와《포은집(圃隱集)》에 한역(漢譯)되어 전함《어느 네티즌의 불로그에서 발췌》


⊙ 역사속의 인물 재 조명

   정 몽주 뿐 만 아니라 교과서 등을 통해 알고 있는 민족의 영웅 맥아더, 월남전 영웅(모모 등등)들, 논개, 이승복 어린이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실상 거리가 있음에도 전하는 과정에서 미화되거나 정치적으로 만들어 진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선 정몽주 그는 과연 충신인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견을 제시해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 내에서 제시하는 하나의 소수의견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라며, 곡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 민족의 최대 비극 6.25가 일어나기 전 남한에 체류하던 외교 관계자들이 미정부 측에 한반도에 전쟁 징후가 농후 하다는 정보를 수차 올렸고, 미 정부는 맥아더에게 전황보고를 요구했는데, 맥아더는 전혀 그런 징후가 없다고 보고 하였고, 전쟁이 터지자 삼팔선 근처에서 약간의 소요사태가 발생 하긴 했지만 곧 진정된다고 보고 하여, 사전 막을 수도 있었던 전쟁인데도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재 조명되면서 인천의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가 대두 되었던 것임.  

 

  정몽주는 이성계의 어릴 적 서당 동문이자 이성계의 책사를 지내기도 했던 사람으로서, 위화도 회군도 정몽주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 이였으며, 최영장군 제거, 창왕 제거, 공양왕 옹립 등 고려 멸망이 기정사실화되는 속에서 정몽주는 이 성계와 입장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 후 이성계가 전제 개혁을 서두르며 보수파 척결에 나섰을 때부터, 정몽주는 중립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보수적 개혁주의자로서 급속한 개혁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고려 조정에서 최고의 벼슬을 약속하며, 이 성계를 견제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그를 준용코자 합니다.

 

  정 몽주는 그 후 그는 반(反)이 성계 진영의 기수가 되었고,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이성계와는 표면상으로는 친교를 맺으면서도, 속으로는 서로를 경계하는 관계로 이어집니다. 이 성계는 문신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정몽주를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정 몽주는 이성계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애써 왔습니다. 이성계는 전제 개혁을 실시한 뒤, 불교와 사원에 대한 배척을 통하여 반 이 성계 진영을 무력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몽주의 주청을 통해 왕이 직접 이 성계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여 정몽주의 정치적 승리로 끝나기도 합니다.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벽란도 근처의 촌락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고, 정 몽주는 이 기회를 틈타  이성계 일파인 정 도전, 남은, 조준 등을 탄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성계의 수족을 제거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정몽주의 영향력과 능력을 심중으로 파악 해오며, 그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던 이방원은 정 몽주가 아버지가 병을 앓고 있는 틈을 타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성계의 귀경을 재촉하여 정몽주의 계획은 무산되기도 합니다. 기회를 잃은 정 몽주는 이 성계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했는데, 이 때 방원이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정 몽주의 마음을 돌려 보려 하였으나 듣지 않자 그를 선죽교(선죽교라 아니라는 설도 제기 되고 있음) 위에서 죽여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몽주가 고려 멸망을 막으려고 마지막 까지 노력하다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정몽주가 고려를 위하여 죽었던 것이라 보기에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정 몽주는 낡은 고려 사회를 지키려는 보수의 거장으로서가 아니라, 고려의 새로운 내일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지나,  그의 죽음을 충신이라는 표현으로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려적인 체제를 원했다거나,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이성계와 맞서다 죽었다기보다는 권력을 유지시키고, 새 정권을 노리던 이방원에 의해 정치적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집니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며, 정치적으로  살해된 정 몽주는 성리학이 치국이념이던 조선에 의해, 신하의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로 필요해, 그 필요성에기인해  만들어져 만고의 충신이 되는 참으로 역사적인 아이러니 속의 인물로 재 조명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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