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깨달음의 수행

아설타 2007. 8. 20. 16:29

                                        깨달음의 수행

                                                                / 송호준

 

깨달음의 수행이란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닦고 진리를 얻는 깨달음의 과정이라 흔히들 생각 합니다.
그리고 수행이 곧 생활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깊이
자각하고 집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생활 속의 바른 삶이 깨달음의 수행이란 것입니다.

 

원효대사께서 젊은 나이에 승려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신라의 국사로 계셨고, 대승기신론소
등 40여권의 불교 서적을 편찬 하며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 분으로서, 국사로 존경
받는 인물로 칭송되고 있을 즈음,  어느 거지스님이 찾아와 깊이 있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갑니다.
“국사께서는 종이로 만든 연꽃 같소이다.” 이 말을 듣고 원효대사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나중에
파계를 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몸소 민초들과 어울리며 당시 귀족 중심인 귀족불교에서 민간
불교인 정토종을 일으켜 민간에 그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종이로 만든 연꽃은 화려하나 생명이 없고, 향기가 없다는 뜻으로 불교에 대한 지식은 해박
하지만 불교의 참 진리를 모른다는 즉, 알맹이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 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찍 깨우쳤으나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수행(일체유심조)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부끄러운 마음에 파계를 하고, 새로운 수행의 과정을 통해 진리를 실천
하게 됩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께서도 나라의 국력이 기울어져 감에 따라 호국불교로 국력을 다져
보려고 국가 행사로 법회를 열었는데, 아주 못생긴 거지 중의 상거지가 병사들을 뿌리치고 들어와
음식을 얻어먹고 있던 중, 행사를 마치고 나오던 왕이 이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거지에게
왕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에는 앞으로 얼씬하지 말 것과, 어디 가서 왕을 보았다는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거지는 미소로 답했습니다. 절대 대왕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 대왕께서도 문수
보살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크게 놀란 왕은 분명 보통분이 아니란 걸 깨닫고, 문수보살을 통해 기울여져 가는 나라를 불력으로
바로 세워보고자 그를 수소문 한 끝에 태화사(울산 태화동 소재)에 가면 문수보살의 거처를
알 수 있다고 하여 신화들과 함께 태화사에 들러 마중 나온 동자를 따라 문수보살을 만나러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동자가 더 이상 따라 올 필요가 없다며, 걸음을 빨리 하는 바람에
동자를 그만 놓쳐버리고 맙니다. 동자의 거취를 놓친 곳이라 하여 무거(無去, 현, 울산 무거동)라고
하며, 왕이 동자가 사라졌다고 생각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 동자의 이름을 세 번이나 크게 외쳤다고
하여 삼호(三呼,  현  울산 삼호교 부근)라 칭합니다.

 

  경순왕은 불력을 통해 국운을 바로 잡기를 원했으나 이미 나라의 운이 다했음과 자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아무런 깨달음 없는 자신은 나라를 다스릴 덕과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태조 왕건
에게 나라를 넘깁니다.

 

 불교수행은 완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난 인생이 되고자하는데 있으며, 유교는 전래의 미풍양속을
숭상하면서 인간을 올바르게 나가도록 인간성 회복을 수행의 도로 삼고 있습니다.

 수행의 도는 고행(苦行)도 아니고 진리의 최고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생활 속의 바른
마음의 실천입니다. 세상 속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덕을 쌓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한 깨우침은 생활 속의 작은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복을 받는 것에만 더 정성을 보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살고 그런 마음
으로 복을 빌면 복을 받게 된다는 논리로 그것이 깨달음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토종(당시
아미타불만 외우면 불도 할 수 있다는 사상)의 영향이 뿌리 깊게 내려온 탓도 있겠지요.

  그러나 수행을 통한 깨우침을 얻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참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음의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깨우침이 무한한 지혜와 해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르침을 통한 깨달음의 수행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라는 전제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죠.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섬기는 갸륵한 정성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을 내 마음 같이
대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염원하고, 끊임없는 사랑을 실천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참 가르침이요, 생활 속에 행해야 하는 깨달음의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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